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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대표시

[詩] 한 삽의 흙 - 나희덕 한 삽의 흙 나희덕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맹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 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내 속의 사금파리에 내가 찔려 피 흘릴 텐데 마른 뿌리에 새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 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더보기
[詩] 말의 꽃 - 나희덕 말의 꽃 나희덕 꽃만 따먹으며 왔다 또옥, 또옥, 손으로 훑은 꽃들로 광주리를 채우고, 사흘도 못 갈 향기에 취해 여기까지 왔다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 허기도 없이 말의 꽃을 꺾었다 시든 나무들은 말한다 어떤 황홀함도, 어떤 비참함도 다시 불러올 수가 없다고 뿌리를 드러낸 나무 앞에 며칠째 앉아 있다 헛뿌리처럼 남아 있는 몇 마디가 웅성거리고 그 앞을 지나는 발바닥이 아프다 어떤 새도 저 잿빛 나무에 앉지 않는다 현대문학 2005년 03월호 中. 더보기
[詩] 연두에 울다 - 나희덕 연두에 울다 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인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눈에 밀어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동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 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 『사라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