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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 詩

[詩] 연두에 울다 - 나희덕


연두에 울다

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인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눈에 밀어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동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 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