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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 詩

[詩] 혈거시대((穴居時代) - 이정록 혈거시대 이정록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 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 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벌레가 처음부터 자기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리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을 불고 동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덮게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 더보기
[詩]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 황병승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황병승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었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 받고 있는가 알기나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마 아저씨들은 ‘야 야 됐어’ 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나 그런 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황병승,『트랙과 들판.. 더보기
[詩] 어느 해거름 - 진이정 어느 해거름 진이정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진이정 유고시집『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 中. 더보기
[詩]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더보기
[詩] 노숙 - 김사인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여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은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출처 :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中. 더보기
[詩]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 김경주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김경주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다 가는 것이다 한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꽂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은걸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다 나르는데 우리는 30년 동안 침을 흘렸다 그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단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리는걸.. 더보기
[詩] 섬 - 정현종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中. 더보기
[詩] 휴전선 - 박봉우 휴전선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리라는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더보기
[詩]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더보기
[詩] 신부 - 서정주 신부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다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