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udy - 詩

[詩] 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9편) 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오늘의 운세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더보기
[詩] 꽃 - 김춘수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의 소묘』, 백자사, 1959. 中. 더보기
[詩] 詩 - 파블로 네루다 시(詩)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 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뭔지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 더보기
[詩]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그리운 여우』, 창작과비평사, 1997. 中. 더보기
[詩] 쉬 - 문인수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나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하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문학동네.. 더보기
[詩] 그 꽃 - 고은 그 꽃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I saw that, coming down the hill The flower I hadn't seen, coming up the hill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랜덤하우스중앙, 2006. 中. 더보기
[詩] 맨발로 걷기 - 장석남 맨발로 걷기 장석남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1991. 中. 더보기
[詩] 한 삽의 흙 - 나희덕 한 삽의 흙 나희덕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맹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 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내 속의 사금파리에 내가 찔려 피 흘릴 텐데 마른 뿌리에 새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 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더보기
[詩] 말의 꽃 - 나희덕 말의 꽃 나희덕 꽃만 따먹으며 왔다 또옥, 또옥, 손으로 훑은 꽃들로 광주리를 채우고, 사흘도 못 갈 향기에 취해 여기까지 왔다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 허기도 없이 말의 꽃을 꺾었다 시든 나무들은 말한다 어떤 황홀함도, 어떤 비참함도 다시 불러올 수가 없다고 뿌리를 드러낸 나무 앞에 며칠째 앉아 있다 헛뿌리처럼 남아 있는 몇 마디가 웅성거리고 그 앞을 지나는 발바닥이 아프다 어떤 새도 저 잿빛 나무에 앉지 않는다 현대문학 2005년 03월호 中. 더보기
[詩] 연두에 울다 - 나희덕 연두에 울다 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인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눈에 밀어넣었다 연두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동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 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 『사라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