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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 詩

[詩] 혈거시대((穴居時代) - 이정록


혈거시대

이정록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 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 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벌레가

처음부터 자기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리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을 불고

동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덮게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새 소리가 있고

회오리치는 바람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게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꼬나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제 집인 양 덩치를 키워 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설지 않다

코를 풀고 눈곱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들의 집은 참 아늑하다



이정록,『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1994.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