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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사회ㆍ문화

[영화평론] 텍스트의 한을 채색하다



텍스트의 恨을 채색하다
- 이청준과 임권택의 <서편제>를 듣고


어릴 적 할머니 방 장롱 안에서 오래된 목거울을 본 적이 있다.
할머니는 세월의 주름처럼 죽죽 금이 간 거울을 가끔 꺼내 보셨다.
할머니는 명절만 되면 목거울을 쥐고 우신다.
나는 그것이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예물이라는 것만 알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울리는 한의 소리를 간혹 짐작할 뿐이다.

  



임권택의 한국화를 감상하기 전에 이청준의 텍스트 소리를 먼저 들었다. 이렇게까지 텍스트의 음역이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소리의 풍경과 북 장단은 작가의 고된 노력으로 어느 정도 시청각화 되었고 섬세한 풍경묘사도 일품이었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아름다운 꽃을 흑백 뷰파인더에 담은 기분이랄까? 한(恨)이라는 무의식과 소리라는 청각을 텍스트 안에 가둬두기엔 너무 잃는 것이 많아보였다. 그래서 임권택은 화선지와 붓을 들고 나섰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장인(匠人)이었다. 화선지에 무엇을 그리기 전에 먹을 충분히 갈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유봉역의 김명곤과 송화역의 오정해는 말할 것도 없고, 까다로운 판소리 장단을 익혀낸 동호역의 김규철은 진하게 간 먹처럼 화선지 위를 누볐다. 그리고 김수철이 아니었으면 누가 했겠는가. 우리 소리 가락에 절묘하게 맞붙은 김수철의 깊은 선율까지 더해지면서 텍스트는 점점 채색되기 시작했다.

커렁커렁한 판소리 가락이 구성지고 절절했다면 영화 전반의 대사들은 수묵화의 여백처럼 조용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유봉이 송화에게 당부하던 "恨을 가지고 그 恨마저 넘어서야 좋은 소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은 시(詩)를 쓴다고 북새통인 내 마음 한 구석에도 파고들었다.

한(恨)을 심어주기 위해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유봉. 한(恨)을 뛰어 넘어 소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송화. 소리판을 뛰쳐 나갔지만 소리를 잊지 못햇던 동호. 서로에게 맺힌 말 못할 한(恨)은 '소리'라는 울타리에서 아름다운 화성으로 합쳐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호가 북장단을 치고 송화가 심청가를 부른다. 둘은 각자의 설움을 소리와 북에 실어 일심동체가 된다. 한(恨)과 한(恨)이 만나 줄타기하듯 흥분된 소리판을 접을 때까지 서로는 모른 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술은 의로운 쪽을 선택하여 어루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밤의 자네들은 운우지락을 즐기는 경지였지."
동거 남편이 한 말에, 송화는 대답한다.
"이제 저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봐요."

이듬해 재사가 돌아오면 할머니는 장롱에서 목거울을 꺼내들고 눈물로 소리를 하실 것이다.
궁금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한다.
비가 내려 장단이라도 맞춰주면 그 뿐.


작성자 : 드라이플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