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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 詩

[詩] 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9편)


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동아일보>

오늘의 운세

권민경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 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 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 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 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이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조선일보>

유빙(流氷)

신철규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눈물 속에 한 사람을 수몰시킬 수도 있고

눈물 한 방울이 그를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

 

당신은 시계방향으로,

나는 시계 반대방향으로 커피 잔을 젓는다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못했다

점점,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갔다

입김과 눈물로 만든

 

유리창 너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서로에게 눈가루를 뿌리고 눈을 뭉쳐 던진다

양팔을 펴고 눈밭을 달린다

 

꽃다발 같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고 백사장에 눈이 내린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모래알

우리는 나선을 그리며 비상한다

 

공중에 펄럭이는 돛

새하얀 커튼

해변의 물거품

 

시계탑에 총을 쏘고

손목시계를 구두 뒤축으로 으깨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최초의 입맞춤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시계 방향으로

당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우리는 천천히 각자의 소용돌이 속으로

다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유빙처럼,



<한국일보>

새는 없다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경향신문>

아버지의 발화점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 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에요.

배추값이 오를 것 같은데. 대학이 다는 아니쟎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생계는 문제 없을 거예요.

그나저나 갈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길, 두통약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남루함이 죄였다. 아름답게 태어나지 못한 것,

아름답게 성형하지 못한 것이 죄였다. 이미 골목은 불안한

공기로 구석구석이 짓이겨져 있었다. 우리들의 창백한

목소리는 이미 결박 당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낮은 곳에

있던 자가 망루에 오늘 때는 낮은 곳마저 빼앗겼을 때다.

 

우리의 집은 거미집보다 더 가늘고 위태로워요.

거미집도 때가 되면 바람에 헐리지 않니. 그래요.

거미 역시 동의한 적이없지요. 차라리 무거워도

달팽이처럼 이고 다닐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아니

집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면. 우리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고층 아파트는 떨어질 때나

유용한거에요. 그나저나 누가 이처럼 쉽게

헐려 버릴 집을 지은 걸까

 

알아요. 저 모든 것들은 우리를 소각(燒却)하고

밀어내기 위한 거라는 걸. 네 아버지는 아닐 거다.

네 아버지의 젖은 몸이 탈 수는 없을 테니. 네 아버지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는

횃불처럼 기름에 스스로를 적시며 살아오셨던

거예요. 아, 휘발성(揮發性)의 아버지,

집을 지키기 위한 단 한 번 발화(發火)

 

*조세희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화법을 인용함



 
<서울신문>

새장

강정애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낡은 그늘과 구겨진 울음소리가 들어있는 이파리들

나무 한 그루를 데우기 위해

붉은 온도를 가졌던 모습이다

저녁의 노을이 모여드는 한 그루 단풍나무 새장


새들이 단풍나무에 가득 들어 있는 저녁 무렵

공중의 거처가 소란스럽다.

후렴은 땅에 버리는 불안한 노래가 빵빵하게 들어 있는

한 그루 새장이 걸려 있다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는 새들

촘촘한 나뭇가지가 잡고 있는 직선의 평수 안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후드득, 떨어지는 새들의 발자국들

모든 소리를 다 비운 새들이 날아가는

열려 있으면서 또한 무성하게 닫혀 있는 새장

허공의 바람자물통이 달려 있는 저 집의

왁자한 방들

잎의 계절이 다 지고 먼 곳에서 도착한 바람이

그늘마저 둘둘 말아 가면

새들이 앉았던 자리마다 새의 혀들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의 혓바닥들만 부스럭거릴 것이다

모두 그늘을 접는 계절

간혹, 지붕 없는 새의 빈 집과

느슨한 바람들만 붙어 흔들리다 간다

한 그루 단풍나무가 제 가슴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저녁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의 귀

누군가 새들의 신발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한라일보>

고사목

고경숙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문화일보>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

강은진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74세 이만호 할머니의 짓무른 등이 

늦여름 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중에도 

푸르스름한 눈썹은 가지런히 웃는다 

그녀가 맹렬했을 때 유행했던 딥블루씨 컬러 

변색 없이 이상적으로 꺾인 저 각도는 견고하다 

스스로 돌아눕지 못하는 날 

더 모호해질 내 눈썹 

눈으로 말하는 법을 배울까 

목에 박힌 관으로 바람의 리듬을 연습할까 

아니면 당장 도마뱀 꼬리같은 문신을 새길까 

누구에게나 꽃의 시절은 오고, 왔다가 가고 

저렇게 맨얼굴로 누워 눈만 움직이는 동안 

내 등은 무화과 속처럼 익어가겠지만 


그 때도 살짝 웃는 눈썹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얼굴이 검어질수록 더 발랄해지는 눈썹이었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바다에 

군무로 펄떡이는 멸치의 눈썹을 가져야 하리 

눈물나도록 푸른 염료에 상큼하게 물들어야 하리 




<전남일보>

손톱 안 남자

송해영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자꾸 자기 말 좀 들어보라며 나를 불러들인다.

무시를 할수록 자꾸 성가시게 군다.

귓가에 쟁쟁하게 맴도는 그 말은

달콤한 사탕을 물려주는 유혹과 같다.

더욱 들여다보라고 보채는 남자,

이 남자가 주는 카타르시스라니!

칠을 벗길수록 더욱 강해지는 스릴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어 나를 정도껏 조종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컬러를 자꾸 재촉한다.

바르라는 속삭임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오면

어쩔 수 없이 들여다보고 한참 얘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나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것을 예상한다.

그냥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일주일은 잠잠할 테지.

손톱 속 남자는 변덕이 심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것, 어느새 이 유혹에 빠져 있다.

손톱 안에 살고 있는 남자,

칠을 지우면 죽어버리는 가혹한 운명의 남자,

내 손톱 안엔 한 남자가 징그럽게 살고 있다.



<광주일보>

어떤 소믈리에

강혜원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결같이 청렴하다네

나 또한 사심 따윈 없으나 무료한 나의 혀는 미지의 회오리를 원하네

 

이를테면 미 개봉 중고를 견디며

숙성과 산화와 변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누설하지 않은 갸륵한 맛

누대에 걸쳐 고단한 오크통을 미워하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서

절치와 부심을 곱씹은 병속의 태풍

태풍 속 부릅뜬 외눈 같은 맛

 

제품명- 언젠가는

생산년도 - 잊힌 지 오래

원산지- 산비알 자드락 젖은 눈시울 밭

맛- 대대로 농축된 옹이 깊은 맛

특징- 어딘가에 스밀 수만 있다면 드라이하게 굴욕을 견딜 수 있음

 

맨 아랫간 먼지 쌓인 와인 병의 바디를 껴안듯 닦아 주었네

이윽고 마개가 열리고

아 적빈의 이토록 깊은 빛깔에 사로잡힌 사이

시큼을 벗고, 놓쳐버린 새콤과 상큼을 획복하려는 눈물겨운 심호흡

 

나는 가장 전문가다운 표정으로

펑펑 축포를 쏘듯 두서없이 웃는 17번 테이블의 브이아이피

오래 묵은 귀빈에게

함부로 묵혀진 이의 비밀을 청아하게 따르려하네

 

세상의 모든 단맛으로부터 격리된

빈 달빛 비탈진 귀가길

자꾸만 들러붙는 허기의 잔가지를 쳐내며

수도 없이 외치고 삼켰을 형언할 수 없는 이 맛을

 

*소믈리에: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와인 감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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